가메이 고레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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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메이 고레노리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가메이 히데츠나의 아들이다. 그는 아마고 씨 몰락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이나바 국 시카노 성을 하사받았고,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랐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영지를 늘렸다. 그는 류큐 열도를 탐냈으나 사쓰마 시마즈 씨에게 저지당했고, 말년에는 가노 번의 번주로서 내정에 힘썼다. 그의 후손들은 쓰와노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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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인 가메이 마사노리는 가노 번주를 거쳐 쓰와노 번의 초대 번주를 지냈으며 오사카 전투에 참전 후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가메이 고레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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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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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메이 고레노리 |
일본어 이름 | 亀井 茲矩 (かめい これのり) |
개명 | 유키 구니쓰나 (湯国綱, 초명) → 유키 고레코 (之子) → 가메이 사네노리 (亀井真矩) → 가메이 고레노리 (茲矩) |
별명 | 신주로 (新十郎, 가명), 조케이 (長卿, 자), 창의 신주로 (槍の新十郎, 애칭), 류큐노카미 (琉球守), 다이슈노카미 (台州守) |
생애 | |
출생 | 고지 3년 (1557년) |
사망 | 게이초 17년 1월 26일 (1612년 2월 27일) |
묘소 | |
묘소 위치 | 돗토리현돗토리시게타카정 다나카 시마네현가노아시군쓰와노정 고시로다의 가메이 가문 묘소 내 교토부교토시사쿄구 구로다니의 곤카이코묘지 묘지 |
관위 | |
관위 | 종5위하, 무사시국 수 |
추증 | 증 종3위 (1912년) |
가문 | |
씨족 | 유 씨 → 가메이 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유 나가쓰나 |
어머니 | 타고 다쓰요시의 딸 |
양아버지 | 가메이 히데쓰나 |
배우자 | 정실: 도키코 (가메이 히데쓰나의 차녀,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양녀) 계실: 타고 시게모리의 딸 |
자녀 | 기타로(鬼丸), 마사노리, 딸 (마쓰다이라 다다키요 실) 등 |
경력 | |
섬긴 가문 | 아마고 가쓰히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봉록 | 이나바국시카노번 번주 |
신호 | |
신호 | 겐부 대신(元武大神), 도게쓰 신령(道月神霊) |
계명 | |
계명 | 고부인덴 주산 도게쓰 다이코지(光武院殿中山道月大居士) (조덴지(譲傳寺)) |
계명 | 료타이인덴 주산 도게쓰 다이코지(凌泰院殿中山道月大居士) (운류지(雲龍寺)) |
계명 | 전부슈타이슈 주산 도게쓰 다이코지(前武州太守中山道月大居士) |
2. 생애
가메이 고레노리는 1557년 주고쿠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씨의 가신 유 나가쓰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신주로(新十郎)였다.[3] 모리 모토나리에게 아마고씨가 멸망당한 후,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메이 가문을 계승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마고 잔당을 지원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에 소속되어 주고쿠 공략에 참여했다. 1581년 돗토리성 공략에 공을 세워 시카노성의 성주가 되었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회군 때 시카노 성에 남아 모리 가문을 감시했다.[2]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행정 능력을 발휘했고, 임진왜란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조선에서 싸웠다. 1592년 당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2] 호랑이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바치기도 했다.[3]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해 참전, 서군 측 돗토리 성을 공격했다. 동군으로 배신한 사이무라 마사히로와 돗토리 성 주변 마을을 불태웠으나,[2] 이 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려 마사히로에게 책임을 전가, 마사히로는 자결했다.[2] 고레노리는 영지가 3만 8천여 석으로 늘어났다.
에도 막부에서는 농업 개발, 은광 개발, 수로 개설 등 행정에 힘썼고, 샴과 교역하는 등 실업가로도 활약했다. 1612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1]
2. 1. 유년기 및 아마고 가문 몰락
고지 3년(1557년) 주고쿠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씨의 가신 유 나가쓰나와 다코 도키타카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신주로(新十郎)였다.[3]이즈모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아마고씨가 모리 모토나리의 공격을 받고 다이묘 가문으로서 멸문되자,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 교토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이 곳에서 아마고 가문 세력을 규합하는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아마고 가쓰히사를 만나게 되는데, 만난 시기는 에이로쿠 11년(1568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이를 고려하면, 덴쇼 원년(1573년) 음력 9월경 아마고 잔당이 이나바국을 중심으로 세를 형성하고 있는 야마나 도요쿠니에 의탁했다가 이반해 모리 가문과 전투를 치른 17세 무렵이 그의 첫 전투로 사료되고, 이 시점에서 고레노리는 이치바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언제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유키모리의 양녀 (가메이 히데쓰나의 딸)를 처로 맞이해 가메이로 성을 바꾼다. 그의 아버지 가메이 히데쓰나는 모리씨가 아마고 씨의 영토를 침략하고 점령했을 때 전투에서 전사하여 가메이 가문의 상속자가 없게 되자, 고레노리가 이 이름을 계승하였다.
2. 2.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섬김
오다 노부나가가 새롭게 떠오르면서, 주고쿠 지방 진출에 아마고 잔당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들을 지원했다. 1578년 아마고 가쓰히사와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이끄는 아마고 잔당은 고즈키 성에서 모리 가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으나, 고레노리는 하시바 히데요시 군에 동행하여 화를 면했다. 이후 히데요시 군에 소속되어 주고쿠 공략에 참여했다.1581년 모리 가문의 깃카와 쓰네이에가 지키는 돗토리성 공략에 공을 세워 이나바 국 시카노성의 성주가 되었으며, 1만 3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전선의 성주가 된 것은 히데요시의 큰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가 회군할 때, 시카노 성에 남아 모리 가문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2]
고레노리는 모리 모토나리에게 멸망당한 니이자씨 가신 유나가쓰나(湯永綱)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니이자씨가 멸망한 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메이 가문을 계승했다.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자 그의 가신이 되어, 도요토미 정권에서 미야베 쓰구루 아래 "이나바 슈(因幡衆)"로서 일하며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문록·경장의 역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조선에서 싸웠으며, 호랑이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보내기도 했다.[3]
2. 3. 임진왜란 참전
도요토미 정권 시절, 가메이 고레노리는 광산 경영, 간척, 용수로 정비 등 행정적인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1592년(분로쿠 원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당포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다.[2] 1597년(게이초 2년) 다시 수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갔다.임진왜란 중 조선에서 포로로 잡은 배에서 발견된 부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명과 "가메이 류큐의 수호(亀井琉球の守, Kamei Ryūkyū no kami)"라는 글귀,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는 히데요시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고레노리에게 류큐의 지배권을 제안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 그러나 당시 류큐 왕국은 독립국이었고, 히데요시는 류큐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없었다.
고레노리는 조선에서의 재진 중에 철포로 호랑이를 사냥하여, 잡은 호랑이를 교토의 히데요시에게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3]
2. 4. 세키가하라 전투와 가노 번주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메이 고레노리는 동군에 속해 참전하였다. 전후 서군 측의 돗토리 성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동군으로 배신한 서군의 다케다 성주 사이무라 마사히로(斎村政広)와 함께 돗토리 성 주변 마을을 불태웠다.[2] 그러나 난이 수습된 후 마을을 불태운 것이 동군의 수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 고레노리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마사히로를 주모자로 고하였다. 마사히로는 자결하고 영지가 몰수되었지만, 고레노리는 소령안도와 영지가 3만 8천여 석으로 가증되었다.[2]고레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 야마나 도요쿠니를 거느리고 최전방에서 싸웠다. 돗토리 성을 공격했으나 견고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서군 측 다지마 다케다 성주 사이무라 마사히로를 배신시켜 원군으로 삼고, 성 아래에 방화하여 간신히 함락시켰다. 이 방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불쾌를 샀지만, 마사히로 한 사람만이 방화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이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참언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미즈구치오카야마 성에 틀어박힌 나가쓰카 마사이에를 본령 안도를 조건으로 항복시켜 성을 개방시켰다.
전후, 공적으로 이나바 다카쿠사 군 2만 4,200석이 증가되어 3만 8,000석의 가노 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 에도 막부 아래에서는 농업 개발, 은광 개발, 수로 개설 등 행정 면에서 기량을 발휘하는 한편, 막부의 주인장을 얻어 샴과 교역을 하는 등, 세계를 향한 시야를 가진 실업가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해 쪽 다이묘가 남만 무역을 행한 사례는 드물다.
2. 5. 말년
게이초 17년(1612년) 음력 1월 26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1] 에도 막부 하에서 황무지 개간, 광산 경영, 용수로 개설 등 내정에 힘썼으며, 막부의 허가를 받아 타이와의 무역을 행하는 등 번의 재정을 견실히 하였다.[1] 동해 쪽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가 해외 무역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그의 재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유랑 시절 긴키에서의 생활과 주군으로 모셨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향으로 유추할 수 있다.[1]3. 류큐와의 관계
1578년, 가메이 고레노리는 뛰어난 공로로 이나바 국 시카노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규슈 정벌에 참여하며 해외 무역으로 부를 얻고자 했다. 그는 이즈모 국의 해안 영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대신 류큐 열도를 요청했다.[2]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노획한 부채에는 히데요시의 서명과 "가메이 류큐의 수호"라는 글귀가 있어,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류큐 지배권을 제안했음을 보여준다.[2] 그러나 류큐 왕국은 독립국이었고, 히데요시는 정당한 권리가 없었다. 고레노리는 류큐를 장악하려 했으나, 류큐와 독점적 무역권을 가진 사쓰마 국 시마즈 씨에게 저지당했다.[2]
고레노리는 류큐에 대한 실질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고,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에 들어갔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의 석고는 증가했다. 고레노리의 후손들은 쓰와노 번의 다이묘가 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통치했다.
즈키(茲키)는 류큐국을 원했고, 히데요시는 "가메이 류큐슈(亀井琉求守)전"이라고 쓴 부채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즈키는 조선 출병 초기 이 부채를 이순신에게 빼앗겼다. 이순신의 전과 보고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状)에는 부채에 대한 기록이 있다. 류큐슈(琉求守)는 율령에 없는 관직명이며, 즈키는 류큐 정벌을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한 번 허락받았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의 류큐 정책은 시마즈 씨를 중개로 하는 체계였고, 시마즈 가의 방해도 있어 즈키의 관직명은 무사슈(武蔵守)가 되었다. 이후 다이슈(台州守)를 사용했으나,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절강성(浙江省)의 대주시(台州市)를 가리킨다. 임진왜란에서 명 공략 실패 후 다시 무사슈를 칭했다.[4][5] 이 일화는 1993년 NHK 대하드라마 『류큐의 바람』 제1화 서두에 묘사되었다.
4. 평가
가메이 고레노리는 신앙심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셋쓰국에 있는 고료 신사를 자신의 집터 안에 있던 현재 위치로 옮겨 모셨다. 또한 게이초 연간에는 이나바국 다카쿠사(돗토리현 돗토리시 시로토 해안)의 시로토 신사를 재건하기도 했다.[1]
정치인 가메이 히사오키, 가메이 아키코 부자가 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가메이 가문은 메이지 시대에 공가인 쓰쓰미가에서 양자로 들어온 시메이의 가계이므로, 가메이 고레노리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다.[1]
5. 일화
- 시바 료타로는 저서에서 가메이 고레노리가 중국보다는 인도에 관심이 많아 자신의 시카노성을 오샤 성(왕사성)으로 명명했으며, 불전에 소양이 있다고 생각된다고 적었다. 이는 모리 오가이, 니시 아마네 등이 자라난 쓰와노번의 학문적 기풍으로 토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4]
- 가메이 고레노리가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강화를 맺으면서 고레노리에게 약속했던 이즈모국의 반을 줄 수 없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다른 영지를 원하는지 묻자, 고레노리는 류큐왕국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가메이 '''류큐노카미도노'''(亀井琉求守殿)라고 적힌 금부채를 고레노리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부채는 임진왜란의 당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노획되었다.[4] '''류큐노카미'''(琉求守)라는 관직명은 고레노리가 히데요시에게 류큐 침략을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4]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에서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류큐의 권익을 차지하면서 고레노리의 관직명은 무사시노카미(武蔵守)가 되었고, 얼마 후 다이슈노카미(台州守)로 바뀌었다. 다이슈는 현재 중국 저장성의 타이저우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다시 무사시노카미로 칭했다.[4][5]
- 당포 해전에서 가메이 고레노리가 전사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 전사한 인물은 구루시마 미치유키이다.
- 고레노리가 조선 출병 시 호랑이 사냥으로 얻은 호랑이를 교토의 히데요시에게 보냈을 때,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고레노리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이 감사장은 히데요시의 화압(花押)이 있지만, 필사는 나가츠카 마사이에가 맡았다. 서장에는 감사와 함께 고레노리에 대한 방어 지시도 적혀 있어, 오랫동안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일한 두 사람의 원활한 소통을 보여준다.[6] 몇 년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측 마사이에는 미즈구치 오카야마성에서 농성했지만, 동군 측 고레노리가 구원병으로 나타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항복하고 성을 넘겨주었다(마사이에는 결국 할복했다).
6. 관련 작품
- 이와이 사무지의 소설 『류큐는 꿈에 있나이다』(각가와가쿠게이슈판, 2006년)
- 히사카 마사시의 소설 『오란다 여』(『장심의 꿈』 수록, 분슌문고, 1999년)
- 이마무라 쇼고의 소설 『꿈은 있으나』(『전국무장전 서일본편』 수록, PHP연구소, 2023년)
- NHK 대하드라마 『류큐의 바람』(1993년, 배우: 폴 목)
- NHK 대하드라마 『군사관병위』(2014년, 배우: 세키 타카아키)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13-04-25
[2]
서적
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3]
문서
贈虎礼状、元武公虎狩之図
太鼓谷稲成神社
[4]
서적
幕藩制国家の琉球支配
校倉書房
[5]
학술지
亀井琉球守再考―亀井茲矩の官途の変遷について―
[6]
문서
贈虎礼状
太鼓谷稲成神社
[7]
서적
船
法政大学出版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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